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슈룹’은 겉으로 보기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궁중 사극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순히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나 궁중 암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가치와 여성 중심의 시선을 통해 사극 장르의 경계를 확장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슈룹’은 기존 사극에서 보기 힘들었던 강한 모성 서사와 여성 리더십, 그리고 제도 개혁을 이끄는 여성 주인공의 능동적인 서사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이면서도 억지 감성이나 전형성을 피하고, 정치·가족·교육·사랑·권력의 문제를 정교하게 엮어냈다는 점에서 비평가와 시청자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이번 글에서는 ‘슈룹’이 어떻게 전통 사극의 외형 속에 현대적 감성을 불어넣었는지, 여성서사, 모성의 재해석, 개혁의 흐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살펴본다.
여성서사의 중심에 선 중전: 조선의 어머니에서 정국의 키 플레이어로
드라마 ‘슈룹’의 중심에는 언제나 중전 임화령(김혜수 분)이 있다. 일반적인 사극에서 중전은 왕비라는 상징적 위치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또는 후궁들과 암투를 벌이거나, 왕실의 도덕적 균형을 상징하는 역할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슈룹’의 임화령은 단지 상징적인 어머니, 왕의 아내가 아니라, 정국을 움직이는 정치 주체이자 변화를 주도하는 실질적인 리더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식을 위한 교육 방향을 고민하고, 권력 암투 속에서 중심을 잡고, 다른 후궁들과의 갈등에서도 현명함과 공정을 잃지 않는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그녀가 가진 ‘권력’이 단순한 태생이나 지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화령은 정보력, 인간관계, 설득력, 윤리의식, 문제 해결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진심으로 상대를 움직인다.
이는 전통적인 ‘조선의 어머니’ 상이 가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면모에 더해,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여성 리더의 면모까지 겸비한 형태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능동적 여성 캐릭터의 롤모델이자, 지금의 시청자들이 가장 바라는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다.
모성의 재해석: ‘내 자식만’이 아닌 모두의 자식을 위한 싸움
드라마 ‘슈룹’이 단순히 자식 교육을 위한 중전의 고군분투기였다면 지금의 반응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모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깊고도 넓다는 데 있다.
임화령의 모성은 단순한 사랑과 헌신을 넘어서, 자식과의 거리, 교육에 대한 철학, 권위에 대한 통제, 그리고 때로는 떠나보내야 하는 용기까지 아우른다. 이는 기존 사극에서 보여줬던 “모든 걸 희생해 자식을 지킨다”는 식의 일방적인 어머니상이 아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하는 부모-자식 관계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드라마 초반, 임화령은 세자의 죽음 이후 무너지지만, 그 슬픔을 딛고 나머지 자식들을 더 강하게,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한다. 또한, 자식의 단점을 감싸는 대신, 직면하게 하고, 꾸짖고, 선택하게 만드는 장면들은 단지 "엄마니까"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함께 성장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까지 보호하고 설득하려 한다. 이는 조선시대의 가족 개념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는 교육자적 모성으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슈룹은 지금 시대 부모들에게 가장 큰 질문을 던진다 — “당신은 자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내 자식만 중요한가요, 아니면 사회 전체의 아이들이 함께 잘 자라야 한다고 보시나요?”
개혁이라는 중심 서사: 여성이 제도를 바꾸다
‘슈룹’의 백미는 후계자 경쟁이나 궁중 정치 싸움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진짜 힘은, 제도를 근본부터 다시 들여다보고 바꾸려는 시도에 있다. 그리고 그 개혁의 선봉에는 임화령이 있다.
조선시대에서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기득권의 저항, 문화적 장벽, 도덕적 논쟁, 인물 간 감정 갈등을 동반하는 거대한 싸움이다. 임화령은 왕세자의 죽음 이후, 이 제도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후계자 교육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녀는 기존의 경쟁 중심, 줄 세우기 중심, 시험과 무능력한 평가제도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이를 교육위원들과의 협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바꿔낸다. 왕조 드라마에서 흔치 않은 여성에 의한 제도 개혁의 성공 서사는 ‘슈룹’이 단순히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또한 이 개혁은 궁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임화령은 다른 후궁들과의 관계, 종친들의 감시, 의정부 대간들의 압박 속에서도 합리성과 윤리를 앞세우며 천천히 구조를 바꾸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는 갈등을 폭발시키기보단 변화를 실현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 매우 성숙한 이야기 방식이며, 현대 사회의 리더십 모델과도 닮아 있다.
결론: 슈룹이 말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드라마 ‘슈룹’은 조선이라는 시대를 빌려 오늘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여성의 역할, 교육의 의미, 모성의 가치, 권력의 본질, 제도의 개혁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조선이라는 틀 안에 빼곡히 담아냈다.
임화령이라는 인물은 단지 왕실의 여인이 아닌, 엄마로서, 리더로서, 한 인간으로서 끝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존재다. 그녀의 선택은 늘 쉽지 않지만, 언제나 깊고 치열하며, 그 모든 고민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슈룹’은 단지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꿈꾸는 이야기이며, 사극이라는 장르가 여전히 유효하고 확장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성을, 어머니를, 그리고 한 사람을 제대로 그려낸 용기 있는 서사가 있다. 그게 바로 슈룹이 특별한 이유다.